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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량공 김준룡장군
현재위치 유물/유적 충량공 김준룡장군

신도비 

 충양공(忠襄公) 김준용(?∼1641)은 무관으로 본관은 원주, 동지중추부사 두남(斗南)의 아들이고 자는 수부(秀夫)이다. 1608년(선조 41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 인조 6년(1628년) 황해병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인조 14년)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여 13일만에 수원 광교산에 이르러 청군(淸軍)과 싸워 청 태종의 부마 양고리를 비롯한 청의 장군 2명을 죽이고 수 많은 적병들을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호란 후 1640년(인조 18년)에 김해 도후부사가 되고 1년 만에 영남절도사가 되었으나 다음 해에 병이 심하여 사임한 후 바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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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신도비는 본래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있었는데, 1972년 도시건설로 시흥시 군자동 산138-1 번지로 이장하였다. 1988년 5월 31일 경기도 시흥시 향토유적 제 13호로 지정되었다. 봉분 앞에 상석,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동자석(童子石) 한 쌍이 서 있다. 신도비는 묘소에서 서쪽으로 약 80m 떨어진 노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두단의 기단석(基壇石)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비신은 오석(烏石)으로 높이 1m4㎝, 폭 65㎝, 두께 22㎝의 규모이며 옥개석은 작지붕 양식이다. 비문은 우의정 허목이 짓고 글씨와 전자(篆字)는 이조참판 오시복이 썼다. 

 

贈 兵曺參判行北道節度使(증병조참판행북도절도사) 전(篆).서(書):오시복(吳始復) 

찬(撰):허 목(許穆) 연대:숙종11년(1685) /소재지: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김준룡(金俊龍) 신도비, 묘소

 

김준룡 장군병자호란때 ‘광교산 전투’ 승리 이끈 영웅 /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경기일보2008.11.17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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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설화를 한없이 간직한 군자봉이 서해와 맞닿은 시흥벌판에 우뚝 솟아있다. 사도세자의 혼령이 주석하고 있다는 무녀(巫女)들의 소곤거림이 아주 못마땅하지 않은 듯 군자봉은 그야말로 군자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군자봉에서 시흥쪽으로 난 큰길을 달리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아래로 작지만 기품 있는 신도비가 하나 서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기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미수 허목선생이 비문의 내용을 지은 것으로 보아 꽤나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바로 병자호란의 영웅 김준룡 장군의 신도비이다. 신도비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면 장군이 영면한 묘소가 때 아닌 길손을 반갑게 맞이한다. 그 묘소 앞에서 군자봉과 김준룡의 알 수 없는 인연을 떠올리며 멀리 바라보일 것 같은 서해로 고개를 돌렸다.이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김준룡 장군의 묘소는 원래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있었는데 도시개발 사업으로 시흥으로 1972년에 이장되었다. 

<중략> 

 

‘국조인물지(國朝人物誌)’에 의하면 김준룡(1586~1641)은 인조 때의 무신으로 자는 수부, 본관은 원주이며, 동지중추부사 김두남의 아들이다. 아버지 김두남(金斗南)은 선조 때의 명인(名人)으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어머니는 담양도호부사 김희필(金希弼)의 딸, 부인은 순창 임씨로 군자감 주부 임계(任繼)의 딸인데 장군과의 사이에 4남 1녀을 두었다.

김준룡은 얼굴 생김이 남달라서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않아 보는 이마다 장차 크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평생을 집에 있으면서 어버이를 마음을 다하여 섬겼으며 형제간에 우애하였고, 임금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자란 김준룡은 1608년(선조 41) 무과에 급제하였다.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한 것은 그의 타고난 무재(武才)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어 관무재(觀武才)에서 장원하여 훈련원의 주부로 승진되었고 곧이어 법성포 수군만호가 되었다. 28세에 마량진 첨절제사에 임명되어 능력을 인정받아 절충장군에 올랐다가 32살인 1617년(광해 9) 8월에 인동부사로 임명되었다. 33살의 무반을 경상도 인동부사로 광해임금이 임명한 것은 그가 단순히 무인으로서의 역량만이 아닌 목민관으로서의 자질과 훗날 조선군의 장수가 될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인동 지역은 당시 남인들의 세거지였기 때문에 남인집안의 무반인 김준룡을 임명하여 북인들에 의해 주도되는 조정에 대한 반감을 축소하고자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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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뒤 영주군수겸 조방장에 제수되어 광해군 폐위로 국가의 기강이 없을 때 치적을 쌓아 옷 겉감과 안감 한벌씩을 하사받았다. 이후 35세에 회령도호부사로 옮겼는데, 특히 인동과 회령에서 수령으로 재임 중 선정을 베풀어 두 곳에서 백성들이 정청비(政淸碑)를 세워줄 정도였다.

1628년(인조 6)년 황해도 병사로 임병되었다가 3년 뒤인 1631년(인조 9) 9월 북병사로 임명되었다. 이때는 후금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조선이 후금에게 외교적으로 항복한 정묘호란 직후였기 때문에 혹시라도 있을 후금의 침입에 대비코자 김준룡 같은 능력있는 장수를 압록강 일대에 두기 위해 특별히 임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특별히 후금과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자 인조는 김준룡을 1636년(인조 14)에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전라병사로 재직하고 있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준룡은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포위된 채 고립무원으로 사태가 급박하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근왕병을 모집하였다.

국왕을 보호하겠다는 근왕병들의 의지는 강했지만 청의 군사력은 너무도 강했다. 중원의 패자였던 대명(大明)의 군대를 물리치고 새로운 황제의 지위에 오른 청태종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가 지휘하는 팔기군은 중국 역사상 징기스칸이 거느린 군대 다음으로 강력한 군대였다. 당연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대를 강화하지 못하고 당파싸움에 치중하던 조선의 군대는 지리멸렬 할 수밖에 없었다.

 

<수지 광교산 전투>  

그는 근왕병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에 진을 치고 적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각처에서 모집한 근왕병은 거의 패몰되고, 오직 김준룡이 인솔하는 병사들만이 남한산성 부근에서 활약하는 형편이었다. 그가 민첩한 군병을 선발하여 청의 유격기병(遊擊騎兵)을 격파하니 군병들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처음 전투에서 패배한 청군은 몽고 공격병 수만을 합해 대병력으로 짙은 안개 속에서 공격하여 왔는데, 마치 풍우와 같아 일격에 대파할 듯하였다.

김준룡은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칼을 뽑아들고 군사들에게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피의 절규를 토하고 화살과 투석이 난무하는 곳에 홀로 서서 지휘하였다. 그와 함께 목숨을 건 근왕병들은 이 모습을 보고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혈전을 거듭하였다. 적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종일토록 격전을 벌였다. 치열한 전투 중에 적의 경기병이 몰래 뒷산을 넘어 산봉우리를 점거하고, 화살은 비오듯 퍼부었다. 그는 급히 용사 수백명을 내어 올라가라고 독려하면서 “이때야말로 충의있는 자가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때”라고 외치며 병사들을 독전하니 휘하의 병사들은 일당백의 정신으로 적을 맞아 선전하였다. 이때 청군 중 갑옷에 말을 탄 장수가 산 위에 홀연히 나타나 큰 기를 세우며 호령하니 적군이 모두 모여들었다. 김준룡은 “저 적장을 죽이지 못하면 적이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독전하며 포를 쏘았다. 김준룡 부대의 포탄에 청 태종의 사위였던 액부양고리(額駙揚古利)라고 하는 적장은 마침내 불귀의 객이 되었고 청의 군대는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조선군의 사상자는 불과 수십 인에 불과하였다.

 

<광교산 철수와 죄받음과 귀양 그리고 사면 >

전투가 끝난 후 곳곳에 쌓인 청군의 시체를 모아 태우니 청군들의 곡성이 처절하였다. 밤이 되어 김준룡은 병사들을 위무하고, 군중을 사열해 보니 포탄도 이미 다 소모되었고, 군량 또한 바닥이 나 내일 아침 적군의 재침 때 대적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부득이 진을 옮겨 군사들을 휴식시키고, 다음 전투를 위한 보급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군사들에게 횃불을 들어 의병(疑兵)을 만들고 은밀히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적병들은 다음날 아침 대병력을 이끌고 와서 살펴보니 이미 조선군은 감쪽같이 철수한 뒤였다. 그러나 적병들은 혹시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감히 추적하지 못하였다. 부대 이동 중 조선군 내에도 도망자와 이탈자가 점차 늘어났다. 김 준룡은 겨우 휘하의 기병 수백 명만을 인솔하고 화성에 이르러 병력이 부족함을 한탄하며,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군사를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이 당시 전라감사 이시방은 적을 공격하는 데는 참가하지도 않았는데 김준룡의 공을 시기하여 공과(功過)를 뒤바꿔 보고했고, 체찰사 박좌도 김준룡이 평소 자기에게 순종하지 않은데 불만을 품고 있어 인조에게 그를 무고하였다. 때문에 김준룡은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죄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대신 최명길과 이성구 등이 극력 김 준룡의 전공을 설명하여 그가 무죄임을 밝혀 이시방은 유배되고, 그의 혐의는 풀려 죄를 면하게 되었다. 

 

<호란 이후의 생애> 

전쟁이 끝난 후 어영중군(御營中軍), 김해도호부사를 거쳐 다시 영남절도사에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에 병이 심해져 상소해서 사임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십여리를 떠나 관사(館舍)에서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군의 죽음과 동시에 남방에 서 큰 별이 떨어지자 정승 김유와 원두표가 조정에 있다가 그 변고를 듣고 말하기를 “하늘이여! 남쪽에서 별이 떨어지더니 과연 한 훌륭한 장수를 잃었도다”라고 탄색하였다. 이에 인조가 특명을 내려 장례를 치르게 하고 치제(致祭)하게 하여 그 공적을 기리게 하였다.

김준룡은 도호부사로부터 절도사에 이르기까지 무장으로서 근무하면서 수십년 동안 약속을 엄하게 하고 상벌을 신뢰있게 하였다. 재물과는 거리가 멀어 살집이 없을 정도로 궁핍하였다. 죽을 때에 이르러서는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이웃들이 치뤄줘 모든 사람들이 김준룡을 어진 선비라고 하였다. 광교산 전투의 승전(勝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자 “이때를 당하여 임금이 이미 욕(辱)되었다. 장병된 신하로써 성하(城下)에 죽지 못한 것이 죄인데, 다른 것이야 무어라고 말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오히려 전쟁에서 죽지 못했음을 한탄해했다. 훗날 그의 전공을 찾아낸 정조는 ‘충양(忠襄)’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어 그의 명예를 회복해주었다. 청렴과 기백 용기를 지닌 조선후기 명장 김준룡은 그래서 오늘날까지 우리 곁에 숨쉬고 있는 것이다. 당대에 영웅으로 인정받지 못해도 역사는 반드시 영웅을 기억하는 법이다.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사진=조남진기자 njcho@kgib.co.kr 

 

 

<병자호란 호남 근왕병(관군+의병)궐기와 승첩>

전라병사 김준룡을 중심으로 한 전남 관민은 조정의 근왕병 모집에 응하여 용인에서 적장을 살해하고 기세를 올렸다. 당시 전라 병사였던 준룡은 호병(胡兵)의 침입 소식을 듣자 전라감사 이시방(李時芳)에게 예비동원의 필요성을 누차 말하였으나 감사는 "국명(國命)없는 동병(動兵)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김준룡은 거의(擧義)호소문을 도내 재야 무인(武人)들에게 보내었다. 이 호소문을 받고 병자년 12월 15일 강진에서 김수만(金壽萬)•수권(壽權) 형제, 함평에서 정대명(鄭大鳴), 광주에서 허익복(許益福)•범진후(?振厚)가 오고 다음날 충주에서 김설(金薛)이 왔다. 이들은 모두 18반 무예에 정통한 인물로서 임진왜란시 선열의 후예들이었다. 김준룡은 스스로 호남 관의연합(湖南官義聯合) 도총장(都摠將)이 되고, 김수만이 호남의병대장, 김설이 호남의병 부장겸 척후장, 김수권이 호남의병 참모장, 정대명이 호남의병 별장, 허익복이 호남의병 선봉장, 범진후가 호남의병 군수장으로서 각지에서 의병과 군량을 단기간에 동원하도록 책임을 맡았다. 이러는 사이에 22일밤 왕의 교서(敎書)가 도착하여 도내 열읍병(列邑兵)을 소집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때 관의병(官義兵)은 도합 3,700여인이 되었고 광교산(光敎山: 용산부근에 진지를 구축하며 3,000의 소병(小兵)으로 10배가 넘는 대병과 접전 끝에 청한(淸汗)의 부마(駙馬)인 백양골라(白羊骨羅) 등의 적장과 수천의 호병(胡兵)을 베고 승전을 올렸다. 이것이 전라 관의 연합군(全羅官義聯合軍)의 승전으로 병자호란시 찾아보기 어려운 대승이었다. 병사 김 준룡의 뒤를 이어 전라도내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병자호란 승첩 암각석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의 광교산(光敎山)에 있는 병자호란 때의 전승지 터와 그 기념비가 1977년 10월 13일 경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 1794년(정조 18년), 수원성(水原城) 축성을 관리하던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썼다. 소재지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이다 

 

광교산 중턱 자연 암벽에 새겨진 [忠襄公金俊龍戰勝地(충양공 김준룡 전승지)] 승전 기념 글씨로, 좌우에는 「丙子胡亂公提湖南兵 覲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는 내용을 덧붙였다. 장군이 청나라 군사를 이곳 광교산에서 크게 격퇴시키자, 1637년1월5일 고립된 남한산성에서는 김준룡의 승전보를 듣고 기뻐하며 안정을 되찾았다고 한다. 훗날 수원 화성 축성을 관장하던 촤의정 채제공(蔡濟公)이 산에 올라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글을 새기게 했다고 전한다.  

 

병자호란 관련 수지의 지명 유래 

 

호항골(胡降谷)-용인시 신봉동  서봉사 터 인근 마을  

호(청)나라 군대가 항복했다 하여 이 골짜기를 호항곡(胡降谷)이라 부른다. 용인시 광교산 서봉사계곡 일대에 하항곡과 상왕곡  그리고 수원으로 넘어 가는 고개를 호항 고개라 한다. 이 골짜기 윗쪽에 광교암(光敎巖)이란 바위가 있고 그 곳엔 정조시 좌의정을 지낸 채제공(蔡濟恭)의 글씨로 김 준룡 장군의 전공을 새긴 전승 암각석비가 있다. 

수원 읍지(水原郡邑誌)』에 따르면 ‘화성을 축성할 때 성역(城役)에 필요한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로부터 병자호란 당시 김 준룡 장군의 전공을 전해 들은 성역 도감 좌의정 채제공이 청군이 항복했다는 호항곡의 꼭대기 자연 암벽에 「충양공 김준룡 장군 전승지(忠襄公 金俊龍將軍 戰勝地)」라 새겼으며 그 글씨 좌우에 「병자청란 공제 호남병 근왕지차 살청삼대장(丙子淸亂公提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고 음각한 비문이 지금도 남아 있다. 충양공이 호남의 근왕병을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청나라 3대장을 죽였다’ 는 내용이다.   

그러나 장군의 승첩 암각 석비가 수원시 경내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전투가 벌어진 지역을 하왕교 일대로 비정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지도에도 호항곡을 호황곡이라 잘못 기록하고 있으며 고개 또한 호황고개로 잘 못 표기되고 있다.    

 

방축골 (方築谷_ 방죽골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수지 1지구 수지 2지구 사이에 걸쳐 있다. 지금은 그린 플라자가 있고 느티나무가 있으며 근처에 수지 구청이 있다. 병자호란 이듬해 정축년에 전라 병사 김 준용 장군이 호남 근왕병을 이끌고 고 용인 수지에 진을 쳤다..마름 모꼴 내지 사각형의 진을 쳤는데, 가운데 식량을 두고 적을 맞아 싸우던 진이라 하여 방진이라 하고 이 동네 일대를 방축 골이라 부른다.

 

동막골과 동천리 

수지구 동천 동의 옛 이름이다. 머내 근방에 있는데, 병자호란 때 김 준용 장군과 청군이 교전을했던 곳이며, 경주 최씨 중시조 최진립 장군이 병자 호란시 이곳에서 순절한 곳이다. 군 막을 쳤던 곳 이란 뜻으로 동막골이라 한다. 동천리는 행정개편 때 동막리와 원천동의 천을 따서 지었다. 

 

머내 (遠川- 잘못 전해 진 지명 )

옛 지명은 험천(險川)이다. 개울이 거칠고 그런 기분이 드는 데서 험한 내라 하였다.  원래 머흐내 인데 흐가 빠지고 머내로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에 멀다는 뜻으로 원천으로 변했다. 잘못된 표기다. 용인 군지에는 최 진립 장군이 순절한 지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실록 병자호란 

1638념 1월 1일 청태종이 탄천에 10만의 군사로 진을 치고 동성의 망월봉에 올라 산성 안을 살펴보았다. 1월 2일 완풍 부원군 이서가 군중에서 죽었다. 임금의 통곡소리가 곡성 밖에까지 들렸고 의복과 명주를 하사하여 염습하게 했다. 영의정에 추증하고 특별히 온왕묘를 세워 이서를 배향하도록 하였다. 1월 5일 전라병사 김준룡이 용인 광교산에서 적장 양고리를 죽이고 승첩을 거두었으나 대부분의 구원병은 오지 않았고 일부 구원병은 패하였다. 

 

김준룡 장군의 군관이 가지고 온 장계  

전라 병사 군관이 "병사께서 1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광교산(용인군에 있는 산. 582m.)에 주둔하고, 이시방 감사도 군사를 거느리고 이미 직산(천원군 직산면)에 도착하셨습니다." 라고 전했다. 이제 적이 험한 곳에 의지하여 곳곳에 진을 치고 있으므로 형세를 관망하여 전진하겠노라고 했는데, 장계를 가지고 온 사람은 사흘 동안을 낮에는 잠복해 있고 밤에만 걸어서 겨우 입성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성내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크세 고무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