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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족보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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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州金氏歷代族譜(戊辰譜)序文 (其一)  원주김씨역대족보(무진보) 서문 (기일)

一八0八年 

敬順王有錢俶之功德子孫衆多若慶州金海安東遂安諸金氏皆其後裔貫分派殊各有譜以別之獨原城之金無譜移封在麗朝中葉則代序不爲不久矣文武名臣代不乏人則門戶不爲不顯矣然而無譜蓋不遑矣以我 朝事言之忠襄公名滿天下斗巖休谷二公名相也不待譜而爲東國大家支派又不甚衍故譜之不作厥有由矣然斗巖忠襄當其國家搶攘之日殫心王事無暇收宗休谷晩年所遭困躓擯擠時勢然也原城之無譜實不遑矣今其後孫多而陵替甚比譜之作烏可已也諸君子是懼是圖遂鳩財而刊板由前則無譜可也由後則不可以無譜也此可以見原金之盛衰而爲是譜者其功亦不少矣噫吾東方素重士大夫維持是賴雖或有陵替之各異他日任世道扶國脈者皆故家遺孫則此譜之成不但收攝婣睦而已由此而顧懷世德勉勵奮發則文武將相安知不復於山東山西乎哉

 

當宁八年戊辰孟春

前參判 坡平 尹弼秉 謹序

 

[한글번역문]

  경순왕께서 전숙(錢俶)의 공덕이 있어 자손이 많다 경주(慶州) 김해(金海) 안동(安東) 수안(遂安)의 모든 김씨들이 다 그 후예다 본관(本貫)을 나누고 파(派)를 달리하여 각각 족보가 따로 있어 이를 구별하였는데 오직 원주김씨(原州金氏)만이 족보가 없었다

  봉작(封爵)을 받아 본관이 달라진 것이 여조중엽(麗朝中葉)이었으니 대수(代數)가 오래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문무명신(文武名臣)이 대대로 나왔으니 문호(門戶)가 들어나지 않은 것도 아니건만 족보가 없었다는 것은 아마 여가를 얻지못한 까닭일 것이다 이조(李朝)에 일로서 말하더라도 충양공(忠襄公)은 이름이 천하에 가득했고 두암(斗巖)과 휴곡(休谷) 이공(二公)은 이름난 정승이다 족보를 기다릴 것 없이 우리나라의 대가(大家)이며 또한 자손들이 그다지 많지않은 까닭에 족보를 만들지 않았음이 그 사유(事由)라 할 것이다

  그러나 두암(斗巖)과 충양(忠襄)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왕사(王事)에 심력(心力)을 다 바친 관계로 가족을 돌아볼 여가(餘暇)가 없었다 휴곡(休谷)은 만년(晩年)에 일이 곤경에 빠지고 배척받은 일은 시세(時勢)가 그렇게 되었던 까닭이다 그러니 원주김씨(原州金氏)의 족보가 없었음은 진실로 여가가 없었던 탓이다 이제는 그 후손이 많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음으로 족보를 만들어야 할 생각이 어찌 나지 않겠는가 제군자(諸君子) 이를 염려하고 드디어 재물을 모아 간행(刊行)하였다 지난날 같으면 족보가 없어도 무방하지만 오늘날에는 족보가 없이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가히 원주김씨(原州金氏)의 성쇠(盛衰)를 엿볼 수 있으니 이 족보를 하는 자(者) 그 공이 또한 작지 않다고 하겠다

  슬프다 우리나라가 본래(本來) 사대부(士大夫)를 중하게 여겨왔다 비록 잘되고 못되는 것이 다를때가 있어도 타일(他日)에 세도(世道)를 맡고 국맥(國脈)을 북돋는 자(者)는 모두 고가유손(故家遺孫)들이다 

  이 족보를 이룩함이 다만 친목(親睦)만 도모할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세덕(世德)을 돌이켜 생각하고 힘써 분발하면 문무장상(文武將相)이 어찌 산동산서(山東山西)에 다시 나오지 않겠는가 

 

당저팔년무진맹춘(當宁八年戊辰孟春)

전참판(前參判) 파평(坡平) 윤필병(尹弼秉) 근서(謹序)

 

 

原州金氏歷代族譜(癸卯譜)序文 (其二)  원주김씨역대족보계묘보서문  (기이) 

一八四三年

我東之金十八祖 敬順王而別宗故別貫其貫原者宗原城伯也原城伯後近千歲刱有戊辰譜戊辰後三十六年重刊而刱有之由無號庵尹公戊辰序盡之矣重刊之端戊辰之譜已兆矣窃謂譜因爲合族而作也合族所以尊祖也尊祖豈直尊其爵乎尊其行也戊辰譜出於千載之餘而其書不過三卷則宗支之未繁也如是至其顯仕也名德也磊落相望可與鉅族譜系相上下以其最顯著言之斗巖休谷之相業也巴江之淸名也具載於先生長者信筆至於忠襄公丙子忠義又當與天壤俱弊是豈獨金氏門之所當尊哉抑亦人人之所尊也不佞又有別尊斗巖之曾王考曰節度公及朴松堂一流人也金思齋欲薦爲憲官己卯時鄭文翼公望之以加我所不知於己卯後公之爲己卯名流也明矣不佞之尊之也安得不異諸人之尊之乎然則數公宜尊也人人所同而況於爲其宗支者乎宜其譜闕之久而刱之刱未久而重之以致其詳且審也雖然尊之以譜不若尊之於心尊之以心不若法之於身使爲金氏者德業法斗巖休谷行義法巴江忠節法忠襄以至於節度公爲一時名賢所推重之實行體以法之家家法之人人法之則是家一譜也人一譜也又奚有於譜刱譜重也然其文獻之爲重也當矣人之有徵者於譜乎者則役於譜者其功豈淺尠哉創之者戊辰譜詳焉重刊者亦詳於重刊譜云

 

上之九年癸卯春 

通政大夫吏曹參議 漢陽 趙亨復 謹序

 

[한글번역문]

  우리나라의 김씨(金氏) 십팔(十八)이 경순왕(敬順王)을 조상(祖上)삼아 종파(宗派)가 벌어진 관계로 각각 관향(貫鄕)을 다르게 가지게 되었다 원주김씨(原州金氏)는 원주(原州)로 그 관향(貫鄕)을 삼은 것이 원성백(原城伯)으로 부터이며 원성백후(原城伯後) 근천년(近千年)만에 처음으로 무진보(戊辰譜)가 생겼고 그뒤 삼십육년(三十六年)만에 중간(重刊)이 되었다 처음된 사유(事由)는 무호암(無號庵) 윤공(尹公)의 무진보서문(戊辰譜序文)에 다 밝혀져 있다 중간(重刊)한 단서는 이미 무진보(戊辰譜)에 조짐 하였다 족보(族譜)란 것은 합족(合族)을 위해 만든 것이며 합족(合族)은 조상(祖上)을 높이려 함이요 조상(祖上)을 높이는 것은 어찌 곧 그 벼슬만을 높이고자 함이겠는가 그 행실(行實)을 높이는데 있다고 하겠다

  무진보(戊辰譜)가 천년후(千年後)에 나왔는데 그 글이 삼권(三卷)에 불과(不過)하니 자손(子孫)들이 번창 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현관(顯官)과 명덕(名德)이 우뚝 우뚝하게 나타난 것은 가(可)히 거족보계(鉅族譜系)와 서로 겨룰만 하다 그중 가장 현저(顯著)한 분은 두암(斗巖)과 휴곡(休谷)의 정승을 지낸 업적이며 파강(巴江)의 청명(淸名)이다 다같이 선생장자(先生長者)의 신필(信筆)에 실리었으며 충양공(忠襄公)의 병자충의(丙子忠義)에 이르러서는 또한 마땅히 천양(天壤)으로 더불어 견줄 것이다 이 어찌 홀로 김씨(金氏) 한 집안만이 높힐 일인가 사람마다 다 같이 높힐 일이다 내 또 특별히 존모(尊慕)하는바는 두암공(斗巖公)의 증왕고(曾王考) 절도공(節度公)은 박송당(朴松堂)의 일류인(一流人)이다 김사재(金思齋)가 헌관(憲官)에 천거하려고 했으며 기묘시(己卯時)에는 정문익공(鄭文翼公)이 바라기를 기묘후사(己卯後事)는 내가 잘 알지못하는 바를 더 잘안다고 하니 공(公)이 기묘명류(己卯名流) 됨이 명백(明白)한 지라 나의 존모(尊慕)가 어찌 모든 사람의 존모(尊慕)보다 다르지 않으리오 그러니 마땅히 공(公)을 높여야 한다는 것은 사람마다 다 같거늘 그 자손(子孫)들에게 있어서랴 마따히 그 족보(族譜)가 빠진것이 오래인지라 곧 창(刱)하야 할 것이며 창(刱)해서 얼마 않되어 또 거듭하는 것은 자세하고 밝음을 이룩하고자 함이라 비록 그렇기는 하나 족보(族譜)로서 높이는 것이 마음으로 높히는 것만 못하고 마음으로서 높이는 것이 몸으로 법(法)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김씨(金氏)된 자(者)로 하여금 덕업(德業)은 두암(斗巖) 휴곡(休谷)을 법(法)하고 행의(行義)는 파강(巴江)을 법(法)하고 충절(忠節)은 충양(忠襄)을 법(法)하여서 절도공(節度公)의 일시명현(一時名賢)의 추중(推重)한 실행(實行)을 체(體)해서 법(法)하고 집집마다 법(法)하고 사람마다 법(法)하면 이는 집이 한 족보(族譜)요 사람이 한 족보(族譜)다 또 어찌 창간(創刊)하고 중간(重刊)하는데 있으랴 그러나 그 문헌(文獻)의 중(重)함이 마땅히 그러한지라 사람의 행실(行實)을 족보(族譜)에 징(徵)함이 있을진대 수보(修譜)를 하는자 그 공(功)이 얕고 적다하겠는가 창간사(創刊事)는 무진보(戊辰譜)에 자세히 말하였고 중간사(重刊事)는 또한 중간사(重刊辭)에 자세히 하였음으로 그만둔다

상지구년계묘춘(上之九年癸卯春) 헌종조(憲宗朝) (서기1843년)

통정대부이조참의  한양  趙  亨  復  근서

 

 

原州金氏歷代族譜(丙辰譜)序文 (其三) 원주김씨역대족보(병진보)서문 (기삼)

一九一六年

族之譜猶家史也合族立系明其源流尊祖敍親作爲實記不其近於史乎原州之金源始於 敬順王派分於原城伯貫以原城伯始也世多聞人羅麗文獻尙矣至于我 朝節度公爲己卯名流相業之有斗巖休谷名節之有巴江忠襄尤其顯著而以科第詞章鳴者不可以指數也其世譜創有於戊辰重刊於癸卯自癸卯重刊距今乙卯爲七十三年之久則其時之中年弱冠已皆零落童稚孩提已多衰朽後生之蕃衍幷漏於前譜若不及今修刊則明其源流何所據乎作爲實記那由得乎此所以金氏僉君子之殫誠竭力從事於修譜如作史之溯源務實也至若先徽之闡發後昆之奮勵已於尹公趙公序文盡之矣愚何更贅而竊以譜近乎史則今於修譜之際觀乎德行事業而有尊慕傚則之心聞於訓誡箴警而有銘佩懲勸之道此奚異於讀史之法哉凡史冊中古人所行之志義猶多興起處況於自家先蹟之可以趾美者乎休谷祀孫基性余小時游也譜役訖問序於余義不敢辭謹撮譜近史之槪書而歸之此非獨爲金氏勉抑亦爲擧世勉後來勉勉之哉

歲丙辰二月  日

資憲大夫行宮內府特進官  晉山  姜  友  馨  謹序

 

[한글번역문]

  한 겨레의 족보는 한 집안의 역사와 같다 겨레를 합(合)하여 계통(系統)을 세우는 것은 그 원류(源流)를 밝히는 것이며 조상(祖上)을 존모(尊慕)하고 종친(宗親)을 서술(敍述)하여 실기(實記)를 만드는 것은 사기(史記)에 가깝지 않으랴

  원주김씨(原州金氏)의 본원(本源)은 경순왕(敬順王)에서 비롯하여 원성백(原城伯)에서 분파(分派)가 되고 원주(原州)로 관향(貫鄕)을 삼은 것은 원성백(原城伯)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世上)에 드러난 인물이 많은 것은 신라나 고려의 문헌(文獻)에 자상하게 나타나 있다

  이조에 이르러 기묘명현(己卯名賢)에 절도공(節度公) 정승에 두암(斗巖)과 휴곡(休谷) 명절(名節)에 파강(巴江)과 충양(忠襄)이 더욱이 드러난 인물이고

과거급제와 문장학행으로 이름이 있으신분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족보창간이 무진년(戊辰年)에 중간(重刊)이 계묘년(癸卯年)에 있었는데 이로부터 을묘년(乙卯年)이 칠십삼년(七十三年)이란 오랜세월이 흘렀으니 그때의 중년약관(中年弱冠)이 이미 다 죽고 어린아이들도 벌써 다 늙었으며 오늘의 많은 후손들 마저 전보(前譜)에 모두 빠젔다 만약 이제 족보를 하지않으면 그 원류(源流)를 밝히려 한들 무엇으로 증거를 삼어 하겠으며 실기(實記)를 지으려 한들 무엇으로 써 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김씨(金氏)의 첨군자(僉君子)가 정성과 힘을 다하여 수보(修譜)에 종사(從事)하기를 사기(史記)를 만들 때 본원(本源)을 찾아 실상(實相)을 힘쓰는 것과 같이 하였다

  선조(先祖)의 아름다운 업적과 후손의 굳센 노력(勞力)은 이미 윤공(尹公)과 조공(趙公)의 서문(序文)에 다 했으니 내가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생각해보니 족보가 역사에 가깝다면 이제 수보(修譜)에 즈음하여 덕행사업(德行事業)이 존모효측(尊慕傚측)할 마음이 훈계(訓誡)와 잠경(箴警)을 듣고 명패징려(銘佩徵勵)할 길이 있으니 이 어찌 역사를 읽는 법과 다를게 있겠는가 대개 역사책 가운데 고인(古人)의 행한 일에 느낄곳이 많은데 하물며 자기(自己)집 선조(先祖)의 아름다운 업적은 말할 필요(必要)가 있겠는가

  휴곡(休谷)의 사손기성(祀孫基性)은 나의 어릴 때 시절 친구이다 보역(譜役)을 마치고 서문(序文)을 내게 부탁함으로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족보가 역사와 가깝다는 말을 간추려서 써 보내노니 이 홀로 김씨(金氏)만이 힘쓸 일이겠는가 온 세상사람들이 후손을 위해 힘쓸 일이다.

병진 이월  일 (서기1916년)

자헌대부행궁내부특진관  진산  姜  友  馨  근서

 

 

原州金氏歷代族譜(戊戌譜)序文 (其四) 원주김씨역대족보(무술보)서문 (기사) 

一九五八年

新羅 敬順王子孫各有食邑分派殊若慶州安東三陟遂安諸金氏皆其後孫矣就考原城之金則 敬順王後傳之八世孫在高麗毅宗朝官門下省事賜食邑于原城有封其伯因以爲貫是原州金氏之鼻祖也其後世多聞人麗史文獻詳載矣至于我 朝世世簪纓而宣廟朝有斗巖相公文學才望稱當時第一云有扈聖功勳 仁廟朝忠襄公有光敎之戰捷狀赫赫事在竹帛尤有先生長者之信筆何必宗支之所尊乎抑亦世人擧皆所當尊也巴江公之淸德也晩橋公之筆翰也休谷公之相業也其後名公碩孺忠孝文學之士世世雲仍而未必盡記矣蓋原金之出生不爲甚久而子孫布在四方氏族甚繁將相繼出聞人甚多可謂東方華閥矣自戊辰刱譜訖今戊戌重刊而凡四修也蓋修譜者仰承先祖而俯敍後孫也非祖先則無以有後孫非後孫則莫能仰承先祖也承先敍後之道莫如修譜修譜之要莫如合族合族必以敦睦爲主也是以原金門中僉君之殫心竭誠忘其勞苦所以繼修者也譜所創設未滿一載譜冊完遂告厥成功原金宗族敦睦之義於斯可見矣自今以後爲金氏者益修敦睦勉勵奮發則後世子孫安得不昌大乎三陟府使公之後裔熙英余之門人也今於修譜之役訖問序於余義不敢辭謹撮修譜敦睦之槪書以歸之後來子孫勉勉之哉

歲戊戌 九月  日

利川  徐  萬  興  謹序

 

[한글번역문]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자손(子孫)이 각각 식읍(食邑) 분파(分派)가 있어 경주(慶州) 안동(安東) 삼척(三陟) 수안(遂安)과 같은 모든 김씨(金氏)가 그의 후손(後孫)이다

  원성김씨(原城金氏)에 대하여 살펴보면 경순왕(敬順王)의 팔세손(八世孫)인 거공(巨公)이 고려 의종조(毅宗朝)에 벼슬은 문하성사(門下省事)를 지내고 식읍(食邑)은 원성(原城)에 받으시며 원성백(原城伯)의 봉작(封爵)을 받으시니 이로써 원주김씨(原州金氏)의 시조(시조)가 되었다 그 뒤에도 세상(世上)에 드러난 분이 많았으니 고려사문헌(高麗史文獻)에 자상하게 나타나 있다 이조(李朝)에 있어서는 대대로 벼슬을 하였으니 선조조(宣祖朝)에는 두암상공(斗巖相公)이 문학(文學)과 재망(才望)이 당세(當世)에 제일(第一)이었고 또 호성공훈(扈聖功勳)이 있었다

  인조조(仁祖朝)에 충양공(忠襄公)은 수원광교산(水原光敎山)의 전첩상(戰捷狀)이 있어 그의 빛나는 공적이 죽백(竹帛)에 실려 있고 더욱이 선생(先生)께서는 훌륭한 신필(信筆)이 있었으니 어찌 그 자손(子孫)들만 숭배할 일이리요 온 세상 사람이 다 같이 숭배할 일이다 파강공(巴江公)의 청덕(淸德)과 만교공(晩橋公)의 필한(筆翰) 그리고 휴곡공(休谷公)의 상업(相業)이며 그뒤 명공(名公) 석유(碩儒) 충효(忠孝) 문학(文學)의 선비 대대자손(代代子孫)들을 일일이 다 기록(記錄)할수 없다

  이어 나고 훌륭한 인물(人物)이 많이 났으니 가이 동방화벌(東方華閥)이라 이를만 하다

  무진창보(戊辰刱譜)부터 이번 무술중간(戊戌重刊)까지 네 번째 닦은 것이다 수보(修譜)를 하는 것은 위로는 선조(先祖)를 잇고 아래로는 후손(後孫)을 펴는 것이다 조선(祖先)이 없으면 후손(後孫)이 있을수 없고 후손(後孫)이 없으면 능히 선조(先祖)를 계승치 못하는 것이니 앞을 잇고 뒤를 펴는 길은 수보(修譜)를 하는 것 뿐이다 수보(修譜)를 함에 있어 중요(重要)한 점은 합족(合族)만 같은 것이 없고 합족(合族)을 하는데는 반드시 돈목(敦睦)이 근본이 된다

  이로 인해서 원김문중(原金門中) 첨군자(僉君子)들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 노고(勞苦)를 잊어버리고 이어 수보(修譜)를 한 것이다 

  보소(譜所)를 마련한지 한해가 못되어 보책(譜冊)이 완수(完遂)되고 그 성공을 고(告)하게 되니 원주김씨(原州金氏)의 종족(宗族)이 돈목(敦睦)한 의(義)를 이에 가히 볼지라 이 뒤로 원주김씨(原州金氏)들은 더욱 돈목(敦睦)하여 힘써 분발하면 후세자손(後世子孫)이 어찌 번창하지 않으랴

  삼척부사공(三陟府使公)의 후예(後裔)인 희영(熙英)은 나의 문인(門人)이라 이제 보역(譜役)을 마치고 서문(序文)을 나에게 청하여 내 감(敢)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히 수보돈목(修譜敦睦)하는 법을 간추려서 써보내니 뒤에 자손(子孫)들은 힘쓸지어다

무술 구월  일 (서기.1958년)

이천  徐  萬  興  근서

 

 

 

原州金氏歷代族譜(辛酉譜)序文 (其五) 원주김씨 역대족보(신유보)서문 (기 오)

一九八一年

國有史氏有譜史與譜雖有上下之不同其規則一也不修國史國都年代不可攷不修譜冊世代宗支不能辨此史與譜之所由作也惟我金氏自原州得貫者久矣在於高麗毅宗朝有諱巨公官至門下省事封原城伯始籍原州寔爲上祖也公之偉行淑德昭載於麗史其後高冠名公世世相承其他世閥之烜赫已備於前述余不必更爲提說矣噫粤在丙申進士(諱天賚)公始草譜冊吾金之譜自此始焉其後戊辰癸卯丙辰戊戌譜所以相繼而重修也且戊戌之距今二十有四載矣以其時則尙早以其代則最適矣繁然之子姓布在八路不得相面派或有漏故嘗竊慨歎何幸己未春門中僉宗發起修譜之議詢謀共通於是設廳于禾谷洞大宗會所內通諭四方遠近僉宗好皆響應 取考各門譜系則或有大同小異之差甚多錯誤之訛是可寒心不已也特有京城族孫張成甫(監察公後孫)隔年守譜所以物心兩面協贊勤務不惜勞苦遍踏四海尋訪遠近之子姓與數多宗族始得面悟其他京鄕各方僉宗草單隔日鱗至於是乎張成甫刻意熱誠夜焚繼晨書寫不已近半餘年而工告訖書草譜乃成惟我金修譜以來初有之大役也其有功於吾門最大矣不肖則任校正而年光眼昏無爲度日不敢自我微勞而大抵張成甫今番重修之功尤重且大矣此後以原金爲姓者不可不知也嗚呼今我同譜之人益修敦睦之誼永保家門豈非幸歟余亦原金之一人也知其始終故擧其事實記而爲序其唯望于諸宗云爾

西紀一千九百八十一年辛酉梧秋念日

始祖二十五世孫  熙  英  謹序

 

[한글번역문]

  나라에는 역사가 있고 집에는 족보가 있으니 역사와 족보가 비록 상하에 구별이 있으나 그 규모는 한가지라 역사를 닦지 않으면 국도와 연대를 상고할수 없으며 족보를 닦지 아니하면 세대와 친척을 분별할 수 없는지라 이러므로 역사와 족보를 작성하는 것이다 우리 김씨의 성과 본이 생긴지 오래인지라 고려의종조(高麗毅宗朝)때 김거공(金巨公)이라는 분이 계시니 벼슬이 문하성사(門下省事)이시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하여서 비로소 향적(鄕籍)을 하게되니 이분이 원주김씨의 상조(上祖)가 되시다 공의 행적과 덕망은 고려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뒤 고관명공(高官名公)이 대대로 계승하고 기타 도덕 문장 충효 절행은 먼저 어른들 서문에 기록되어 있으니 다시 더 말할 필요가 없도다 슬프다 예전 병신(丙申)년 진사 명천뢰(名天賚)공께서 비로소 초보(草譜)를 작성하니 우리 김씨의 족보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뒤 무진(戊辰) 계묘(癸卯) 병진(丙辰) 무술(戊戌)보를 계승하야 중수(重修)하게 되니라 또 무술년으로부터 지금까지 이십사년이나 되었으니 족보중수할 시기는 아직 이르나 대수로는 가장 적당하도다 번성한 자손들이 사방에 펼쳐저 살고있어서 서로 상면하지 못하야 혹 자손들이 루보(漏譜)되는 한탄이 있더니 다행이도 일천구백칠십구 기미(己未)년 봄에 종중 어른들이 수보(修譜)에 의론(議論)을 발기하니 그 공론이 한가지로 통하는지라 이에 서울 화곡동 대종회의소에 보소(譜所)를 정하고 사방에 통보하니 여러종친께서 다 호응하는지라 여러문중의 보계를 상고해본즉 대동소이의 차이가 있고 착오된 부분이 많으니 이 가히 한심하기 그지 없도다 특히 서울에 계신 장성(장성) 감찰공사손(감찰공사손)께서 격년(격년)토록 보소에 항시 근무하여 물심양면으로 협찬하고 우애하야 노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사방에 다니면서 종친을 심방하니 이왕에 루보되었던 여러종친이 비로소 알게되었다 기타 경향각지에서 명단이 연일 날아오니 이때에 장성씨는 정성을 다하야 밤을 새워가면서 부지런히 서사(서사)하는데 반년이 지나서야 초보(초보)가 완성되니 우리 원김수보(원김수보) 이래로 처음있는 큰 역사이니 우리문중에 그 공로가 가장 크도다 나로서는 교정을 맡고있으나 나이 늙고 눈이 어두워서 하는일 없이 날을 보내고 있으니 어찌 감히 로고가 있다 하리요 대저 장성씨가 금번 수보의 공이 중하고 크니 이 뒤 원주김씨로서는 가히 잊을수 없도다 슬프다 우리자손으로서는 더욱 돈목의 의를 닦고 길이 가문(가문)을 보존하면 어찌 다행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원주김씨의 한 사람으로서 그 시종(시종)을 아는고로 그 사실을 들어 기록하야 서문을 쓰니 다만 문중 여러어른께 널리 양해를 바랄뿐이로다

서기 일천구백팔십일년 신유(辛酉) 칠월 이십일

시조이십오세손  熙  英  삼가씀

 

 

 

原州金氏歷代族譜(戊子譜)序文 (其六) 원주김씨역대족보(무자보)서문 (기육)

二00八年

  國有史하고 氏有譜라 歷史는 그 나라의 基本이요 族譜는 그 氏族의 基本이다 이리하여 한 나라가 서면 그 나라에서는 創業後 三代王에 이르러 그 나라의 歷史를 編纂하고 氏族은 三十年만에 그 氏族의 族譜를 編纂하는 것이 基本으로 되어 있다 우리 原州金氏의 源流는 新羅金閼智大輔公에서 新羅敬順王에 이르렀고 다시 高麗朝諫議大夫疇의 셋째아드님 諡文忠公이신 諱巨公이 高麗毅宗朝때 原城伯의 封爵을 받으심으로서 비롯되었으니 우리 原金의 歷史는 今年이 八百四十五年이 되었다 近千年이란 歲月이 흐르는 동안에 高麗朝에서는 文武將相이 連出하였고 李朝에서는 判書公이신 諱乙辛이 그리고 戴敬公都護府使公이 原從功臣을 左相이신 斗巖公이 扈聖功臣의 榮光을 이루었고 忠襄公이 丙子胡亂때 水原 光敎山에서 大戰捷을 이루었으니 爲國忠節의 氏族이라 自負하지 않을 수 없다 李太祖가 漢陽에 都邑을 하자 各氏族은 서로 뒤질새라 漢陽을 中心으로 大擧移動을 하게 되었다 이때 判書公은 開城에서 그 아드님 直長公과 戴敬公을 帶同하고 長湍으로 오시어 基盤을 이루시었다 그후 判書公의 弟 原城君과 文義公이 長湍으로 오게 되었고 그후 判書公은 다시 長男 直長公을 帶同하고 다시 禾谷洞에 오시어 우리 原金의 基盤을 이룩히시었다

  이번 族譜에 있어서 苦心이 많았던 것은 戊戌譜前까지는 諱瑨을 一世로 하였고 戊戌譜에는 元度公諱晐를 一世로 바꾸어진 것이다 이에 對해서 왜 자주 바뀌었을까 그 點은 戊戌譜前까지는 諱 瑨이 初入李朝라고 해서 諱瑨을 一世로 하였고 戊戌譜에서는 諱晐가 初入李朝라고 해서 였다는 것이다

  族譜編纂이란 先代의 史的인 關係를 새로 찾아내는데도 目的이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번 族譜 亦是 先代의 史的인 關係를 찾는데 苦心을 하였다 그 結果 諱晐가 李朝時代가 아니고 判書公諱乙辛이 李朝初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華海師傳에 依하면 文貞公諱得雨는 高麗時代 有名한 鄭夢周 元天錫 金子粹 等 여러 人士들과 交分이 두터웠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高麗가 亡하자 隱遁生活을 하다가 餘命을 마쳤다는 것이다 判書公이 李朝王朝實錄에 依하면 李朝初에 原從功臣의 功勳을 받으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리하여 이번 族譜에 判書公의 王朝實錄上의 史的인 關係를 찾아 判書公의 年譜를 紀錄하였다 그런데 重要한 것은 過去族譜編纂時는 先代의 史的인 關係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時代的인 흐름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過去時代는 李朝王朝實錄等 여러 가지를 高官들도 볼 수 없는 時代였기 때문에 方法이 없었고 現在는 歷史를 다 볼 수 있는 時代의 差異인 것이다 이러기 때문에 이번 族譜는 文貞公諱得雨까지 高麗時代로 判書公諱乙辛을 李朝初로 된 것뿐 다른 意味는 없다 이번 族譜를 編纂하기로 決議하여 族譜編纂委를 構成하였으나 여러 가지 事情으로 解體되었다 그러나 相當한 時日이 지난 後 族譜編纂委를 構成하였으나 참담하기 말할 수 없었다 모든 書類 하나 具備된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은 現實을 그 누누이 다 말할 수 있으랴 族譜編纂史上 初有의 일이다 雪上加霜으로 前日編纂委의 後遺症까지 兼하였다 이 모든 苦痛을 삼키면서 勞力한 結果 苦盡甘來라 하였던가 族譜編纂에도 香氣로운 물결이 다가왔다 이리하여 編纂委는 活氣를 찾게되어 잘 進行이 되었다 나는 年老病弱하여 큰 힘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族叔行樂氏가 原動力이 되어 큰 힘이 되었고 늦게나마 族叔行祿氏도 參與하여 어려움 없이 이번 戊子譜를 脫稿하게 되니 이번 戊子譜는 苦痛의 歷史가 담긴 族譜라 하겠다

西紀 二00八年 戊子 十二月  日

後孫   龍   成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