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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김씨(原州金氏) 시조(始祖) 김거공(金巨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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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순왕(新羅 敬順王)의 제 8자(第 八子) 상서령 일선군(尙書令 一善君) 

김추(金錘)의 칠대손(七代孫) 문하시중(門下侍中) 원성백(原城伯) 

 

원주김씨의 연원(淵源)

우리나라 최대성씨(最大姓氏)인 김씨(金氏)의 본관(本貫)은 수백본(數百本)으로 되어 있지만 기실(其實)은 가락국(駕洛國)의 김수로왕(金首露王) 후손(後孫)과 신라왕국(新羅王國)의 김알지(金閼智) 후손(後孫)으로 양분(兩分)되어 있다.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은 김해김씨(金海金氏)를 대종(大宗)으로 하고 있으며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은 경주김씨(慶州金氏)를 대종(大宗)으로 삼고 있다  

원주김씨(原州金氏)는 범신라김씨(汎新羅金氏)의 원조(元祖) 휘(諱) 알지(閼智) 대보공(大輔公)의 이십칠세손으로 신라 마지막 임금이신 휘(諱) 부(傅) 경순왕(敬順王)의 제팔자이며 고려 왕건태조(王建太祖)의 외손자인 휘(諱) 추(錘) 일선군(一善君)의 칠세손 휘(諱) 거공(巨公)께서 고려 의종조(毅宗朝)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올라 원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으시고 원성백(原城伯)에 책봉(冊封)되심으로써 자손들이 휘 거공(巨公)을 시조로 하여 관향(貫鄕)을 원주로 삼았다

시조(始祖) 이하(以下) 이세(二世) 휘 윤간(允侃) 문하시중(門下侍中) 삼세(三世) 휘 시보(時寶)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 사세(四世) 휘 양신(良信) 정당문학(政堂文學) 오세(五世) 휘 자(資) 대호군(大護軍) 육세(六世) 휘 의(義) 선주수령(宣州首令) 칠세(七世) 휘 진(瑨) 병부상서(兵部尙書) 팔세(八世) 휘 해(晐) 이부상서(吏部尙書) 시(諡) 원도공(元度公) 구세(九世) 휘 득우(得雨) 예부상서(禮部尙書) 시(諡) 문정공(文貞公)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길에 오를만큼 원주김씨(原州金氏)의 고려시대 열력(閱歷)은 화려(華麗)하였다

또한 조선왕조 오백년간(五百年間)에는 십세(十世) 휘 을신(乙辛) 공조판서(工曹判書) 십일세(十一世) 휘 연지(連枝) 대경공(戴敬公) 십육세(十六世) 휘 응남(應南) 두암상공(斗巖相公) 십칠세(十七世) 휘 준룡(俊龍) 충양공(忠襄公) 십구세(十九世) 휘 덕원(德遠) 휴곡상공(休谷相公) 등 빼어나신 공경장상(公卿將相)을 비롯하여 수 많은 대소관환(大小官宦)이 연출(連出)함으로써 원주김문(原州金門)의 위상(位相)이 국내 유수(有數)의 망족(望族)으로 계계승승(繼繼承承) 이어 오고 있음은 오로지 시조(始祖) 원성백(原城伯)의 심후(深厚)한 공덕(功德)이 고려사(高麗史)에 소소(昭昭)하게 나타나고 있음으로 미루어 보건대 전(傳)에 이르기를 적선(積善)한 가문(家門)은 후대에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다고 하였거니와 현세(現世)에 이르도록 우리 원김예손(原金裔孫)들이 사방에 번창(繁昌)하고 영달(榮達)함이 곧 시조(始祖) 원성백(原城伯)의 유은지덕(遺恩之德)일진대 우리 후손들은 남다른 자긍심(自矜心)을 간직하고 선세(先世)의 얼을 영원(永遠)토록 깊히 새겨야 할 것이다 

 

◉ 2015년 통계청(統計廳)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김씨(原州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3.2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주김씨(原州金氏) 시조(始祖) 문충공 김거공(文忠公 金巨公) (1096 ~ 1163, 숙종 원년 ~ 의종 24년)

원주김씨(原州金氏)의 시조이다. 원주김씨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金閼智)가 시조인 경주김씨(慶州金氏)로부터 분파 되었다. 처음 이름은 자표(子彪), 봉호는 원성백(原城伯)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제15대 숙종 원년(1096 : 병자년) 3월 3일에 개성에서 간의대부 김주(金疇)의 6남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림학사 김미연이 조부이며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여덟 번째 아들 일선군 김추(金錘)가 7대조가 된다.

천품과 자질이 영명하고 시서에 능통하였으며 천문지리에 통달하여 서리(筮理)에 선발되어 출사하였다. 서리는 나라의 길흉화복을 미리 예상하는 직책으로 추정된다. 예종 9년 (1114)에 여진부족에서 아구타(阿骨打)라는 영걸이 나와 거란족의 요(遼)나라를 격파하고 다음해에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금나라는 건국 10년만인(1125, 인종 3년)에 송(宋)나라의 수도 개봉을 공격하여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북종은 멸망하고 송나라 황족 일부가 항주로 내려가 남송을 세웠다. 

이처럼 국제정세가 숨가뿌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고려 조정은 정리정략에 눈이 먼 정상배들로 제대로 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물론 사치풍조의 만연으로 나라의 장래가 몹시 위태로웠다. 이때 김거공은 이 난국을 슬기롭게 넘기기 위해서는 새로 흥기한 금나라와의 국교 수립이 가장 시급한 사항이라고 강조하였다. 조정에서는 김거공의 건의를 묵살하다가 사태가 초위급 상태데 이르자 금나라와의 교섭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금나라는 고려에서 보낸 국서에 표(表 : 황제에게 올리는 글의 형식)가 없고 말미에 신(臣)자를 거(巨)자로 가서(假書)하였다 하여 이를 받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혼란 상태에 빠져버렸다. 결국 고려 조정은 실권자 이자겸(李資謙)과 탁준경(拓俊京)의 주도로 중신회의를 연 끝에 김거공을 사신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고려의 운명을 양 어깨에 짊어진 김거공은 결연히 금나라에 들어가 고려 존망에 관한 어려운 문제들을 잘 해결하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이에 인종(仁宗)은 직접 금대(金帶)를 하사하였다. 

대외적으로 위기가 가까스로 수습되자 상하 불목과 정권투쟁이 또 다시 재연하였다. 외척 이자겸의 발호가 왕권을 능멸하기에 이르자 왕은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미리 알게 된 이자겸은 탁준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인종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이자겸은 그러나 얼마 못가 심복인 탁준경과 반목하여 결국 그에 의해 축출됐고 탁준경 역시 탄핵을 받아 쫓겨나는 등 내정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김거공은 이러한 와중에 이부시랑중강(吏部侍郞中講), 학사 겸 합문(學士 兼 閤門), 좌우상시(左右常侍), 참지정사(參知政事)등 요직을 차근차근 역임한 끝에 인종 23년(1145)에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의종 15년(1161)에는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가 이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자리를 옮겼다가 추밀원 판삼사사(樞密院 判三司事)에 올랐다. 그 후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의종은 김거공의 수십 년에 걸친 충절공훈을 기리어 원성(原城 : 원주)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하였다. 이르 계기로 김거공의 후손은 원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의종 17년(1163 : 癸未年) 5월 5일에 타계하니 향년 68세였다. 김거공은 풍채가 뛰어나고 말을 조리정연하게 잘하여 오늘날의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에 해당되는 합문(閤門)을 항상 겸직하였다. 김거공이 타계한지 7년 뒤인 의종 24년(1170)에 정중부(鄭仲夫)의 주도로 무신정변이 일어나 무신들을 무시하던 문신들이 대거 죽임을 당했다. 이후 사람들이 김거공이 일찍 재보(宰輔 : 재상)가 되었다면 이자겸의 난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며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정중부의 난도 벌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하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개성 봉명산에 장사 지냈고 배위는 혜화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니 의종 24년(1170) 12월 18일에 타계하니 합폄하였다. 아들 윤간(允侃)도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에 올랐다.

묘소는 오랜 세월이 지난 데다 남북분단으로 애석하게도 실전하여 2000년에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초리 세곡(津東面 哨里 細谷)에 단묘를 설치하고 매년봄 식목일(한식)이면 각처에서 후손들이 모여 단묘제를 봉행한다.2007년 10월에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

 

본관 연혁

원주(原州)는 강원도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 또는 치악성(雉岳城)인데,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북원소경(北原小京)이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북원경(北原京)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원주(原州)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 군으로 바꾸어 열월군과 제천군을 속군으로 평창현·단산현·영춘현·주천현·황려현을 속현으로 거느린 큰 군이 되었다. 1259년(고종 46)에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260년(원종 1)에 원주군으로 복구되었다. 

1269년(원종 10)에 정원도호부(靖原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1291년(충렬왕 17)에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로 개칭되었다. 

1308년(충렬왕 34)에 원주목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성안부(成安府)로 강등되었다가 1353년(공민왕 2)에 원주목으로 회복되었다. 

조선에 들어서도 원주목을 유지했으며, 강원도의 관찰사(觀察使) 영(營)이 위치한 행정중심지였다. 1683년(숙종 9)과 1728년(영조 4)에 잠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23부를 실시함에 따라 강원도의 감영이 폐지되고 충주부 소속의 원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도제 실시로 강원도 원주군이 되었다. 1955년 원주읍이 원주시(原州市)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原城郡)이 되었다. 1989년 원성군을 다시 원주군으로 개칭하였고, 1995년 원주군이 원주시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원주김씨(原州金氏)는 신라왕실의 후손(後孫)으로 경순왕(敬順王)의 제팔자(第八子)이며 고려태조(高麗太祖)의 외손자(外孫子)인 일선군(一善君) 김추(金錘)의 7세손(七世孫)이신 김거공(金巨公)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김거공(金巨公)의 호(號)는 청한당(淸寒堂)이며 시호(諡號)는 문충 (文忠)이다. 그는 고려의종조(高麗毅宗朝)때에 이부상서(吏部尙書)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판삼사사(判三司事)등을 역임하고 그 후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의종(毅宗)은 김거공(金巨公)의 수십년에 걸친 충절공훈(忠節功勳)을 기리어 원주(原州)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고 원성백(原城伯)에 봉(封)하였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이 관향(貫鄕)을 원주(原州)로 삼게 되었다. 

 

 

원주김씨.분파도 (原州金氏.分派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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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표 (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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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파의 이동분포상황]

• 문정공파 원성군계 : 장단에서 영월 문경 파주 등지로 정착하였고 일부는 이북으로 이주하였다.

• 문정공파 문의공계 : 장단에서 문천과 안변으로 이주하였다.

• 문정공파 현령공계 : 이천 하남으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이북으로 이주하였다.

• 대경공파 : 장단에서 해주로 이주하였고 대부분 장단에 그대로 정착하였으며 일부는 영종도 운남리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 병판공파 : 양천에서 계속 정착하였으며 일부는 양천에서 보령 예산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 감찰공파 : 양천에서 재령으로 이주하면서 일부는 충남아산 등지로 이주하였다. 

• 찬성공파 : 양천에서 전북남원으로 이주하였다가 일부는 남 원에 그대로 정착하였고 일부는 전남곡성 전북 완주 광주시 광산구 충남금산 전남해남등지로 각각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 두암공파 : 양천에서 충남천안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일부는 황해도 신천으로 이주하였다.

• 부사공파 : 양천에서 그대로 정착하였으며 일부는 강원도 춘천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 파강공파 : 양천에서 그대로 정착하기도 하였으며 대부분은 충남보령 예산 공주 서산 당진 경남밀양 전남 구례등지로 각각 이주하여 정착하였으며 황해도 연변으로도 이주하여 거주하였다.

• 충양공파 :후손 대부분이 양천에서 그대로 정착하였다.

• 휴곡공파 : 후손 대부분이 양천에서 충남당진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